시론 - 정용구(본지 논설위원/대한노인회 중앙회 이사/국민통합연대 경기본부 고문)

남의 잘못된 점이나 결점을 드러내어 헐뜯고 공격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행위를 비방 또는 비난이라고 한다. 반면에 비평(批評)이란, 사물에 대한 선악(善惡), 시비(是非). 미추(美醜), 장단(長短) 등을 분석 평가하는 글이나 말로 열린 세상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역할을 하는 것을 비평 혹은 평론(評論)이라고 본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정치가 본받고 칭찬하는 너그러움은 없고 아전인수식 비난과 비방 일색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기 이익과 영욕(榮辱)에만 갇힌 독선의 아집(我執)이 국민을 갈라치기하고 국운마저 가로막고 있음을 분노(憤怒)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진 지도자는 선한 국민과 함께하고 악한 정치는 국민을 고달프게 하여 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한다. 

이를테면 백성을 비하 발언한 신하를 편전에서 크게 꾸짖은 세종의 성정(聖政)이나 효심이 지극정성인 성종을 전자에 가름하며, 만고의 충신 충무공을 곤장치고 옥고를 가했던 선조와 색정(色情)에 빠져 난도질로 독선과 폭정을 해온 연산이 후자에 속한다.

불행하게도 작금의 정치무대를 바라보면 사회적이나 도덕적은 물론 법률적으로도 어느 하나 성한 데가 없는 문제의 위선자들이 영웅이라도 된 듯이 선동적 위장술로 떼 지어 설쳐대고 있다. 예컨대 단연코 자기만이 나라를 구제하고 복지국가를 만들어 국민과 태평성대를 누리게 할 수 있다고 거침없는 호언장담을 늘어놓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 머릿속에는 아마도 국부 이승만도 박정희 대통령도 가소로운 존재로만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에 자칭 위대한 그들을 무인도나 우주 벌판에 내려놓는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 것인가를 가상(假想)해 보면 쓴 웃음이 난다. 몇 년 전에 작고한 저술가이자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를 비롯한 헨리 키신저, 허버트 험프리, 리콴유, 폴 케네디, 넬슨 만델라, 린든 존슨, 아이젠하워 등 세계적인 지도자 30명이 남긴 어록에 박정희 예찬론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하버드대학교 비교정치학 과목중에도, 독일 국정교과서인 중학교 지리책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는 세계 경제로 통합되었다’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등소평은 ‘박정희는 나의 멘토다’라고 했다. 

김정일의 찬사에 이어 푸틴도 “박정희에 관한 책은 어떤 책이라도 다 가져오라. 그는 나의 모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가스프롬’ 등 러시아의 주요 에너지 기업과 전략산업의 국영화를 통한 경제개발 방식도 ‘박정희식 모델’을 답습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역행자들에겐 그 아름다운 보석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비난만 익숙해진 그들이라 역사의식이나 바른 가치관이 결여되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도리와 기본이 없는 허장(虛張)들로서 선(善)하고 의(義)로움도 없고 아름다움도 모르는데 무엇을 논할 것인지? 속담에 ‘돼지 목에 진주를 걸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는 구절이 생각난다. 독선과 독주에 매몰된 사막에다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은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겠는가?

애초부터 동행과 공생에 대한 사회적 철학이 전무한 그들을 보는 필자의 안목으로는 허상(虛想)으로만 보이는 시대의 아픔일 뿐이다.

이와 같은 실재도 없는 이념적 허욕에 함몰되어 국가의 존립과 국민을 도탄에 빠뜨려 불행해진 나라가 그리스를 비롯해 수없이 있었다.

 1900년대만 해도 탄탄한 경제대국으로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높은 세계 5대 경제부국으로 잘 살았던 아르헨티나가 그러했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필리핀이 선동적인 위선자들의 가식에 몰락을 가져왔으며 세계 석유 매장량 1위인 베네수엘라도 차베스의 선동적인 독자적 반미정책으로, 또 패거리 독선 정치에 몰입된 이라크의 후세인 정부도 국가와 국민 모두가 회생(回生)이 요원한 고달픈 운명의 늪에서 고난의 길에 처해 있다.

살펴보건대 나라와 민족은 다르지만 성장기에 가정에서부터 가족 간에 사랑으로 공생의 마음을, 학교에서는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협동 정신을, 직장에서는 질서와 도덕의식을 우선시하고 이웃과 사회생활은 섬기고 존중하는 덕성(德性)을 쌓아왔던 모범적인 공통점이 위대한 지도자의 길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무릇 상대의 좋은 점은 칭찬으로 높이 평가하고 부족한 점은 채워주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생존의 의미가 있고 삶의 여정(旅程)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동행이 되는 길이다.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몰락시킨 자코뱅당의 피에르의 죽음처럼 습성화된 비난은 죄악의 무덤을 낳고 언젠가는 자신도 그 무덤에 묻히게 된다는 진리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인생인데 굳이 그렇게 살 이유가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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