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님의 金言一針 - 松汀 조춘식(전 경북 예천군지회 노인대학장)
黃廬亦樵否(황려역초부) 霜葉雨空汀(상엽우공정)

조선 정조시대 노비(奴婢) 시인(詩人) 정초부(鄭樵夫)는 사대부(士大夫) 여춘영(呂春永 1734~1812)의 집에서 나무를 하고 잡일을 하는 천한 신분의 천민(賤民)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詩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여영춘 아버지의 배려 때문이었다. 여영춘의 아버지는 아들 영춘에게 글을 가르칠 때 노비 정초부에게도 함께 가르쳤다. 그리하여 당시에도 초부의 이름 彛載(이재)는 잘 몰라도 그의 詩를 아는 사람은 많았다.

노비 이단전(李亶佃)과 더불어 정초부는 천민이라 이름도 없이 초부 즉, 나무꾼일망정 詩로 일세를 풍미한 시인이다. 그의 詩는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발견됐다. 詩의 제목은 ‘동호범주(東湖泛舟)’로 ‘초부유고’에 실린 것과 동일하다. 김홍도는 이 詩에 영감 받아, 도강도(渡江圖)를 그렸다.

東湖春水碧於藍(동호춘수벽어람)

동호의 봄 물결은 쪽빛보다 푸르고

白鳥分明見兩三(백조분명견양삼)

또렷하게 보이는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柔櫓一聲飛去盡(유노일성비거진)

노 젓는 소리에 새들은 날아가고

夕陽山色滿空潭(석양산색만공담)

노을 진 산빛만이 강물에 가득하다

여춘영(呂春永)의 문집 헌적집(軒適集)에는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여춘영이 그를 추억하며 지은 만시(輓詩) 12수가 담겨있다. 그 중 한 시에서 여춘영은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 뿐이었지” (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라고 정초부를 추억하기도 했다. 

여춘영은 초부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哭樵夫葬 歸路有吟(곡초부장 귀로유음)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黃廬亦樵否(황려역초부)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霜葉雨空汀(상엽우공정)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三韓多氏族(삼한다씨족)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來世托寧馨(래세탁녕향)

그의 詩句 가운데 난뱅이 노비의 곤궁한 생활상을 표현한 작품도 없지 않다.  “낙엽에는 쌀을 꾸는 편지를 자주 쓴다(黃葉頻題乞米書)”라는 구절도 있을 만큼 굶주림은 그의 끼니였다. 

다른 작품에서 “한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빛 구경하려는 것 아니고, 아침 세 끼 곡기 끊은 것은 신선되려는 것 아닐세(半夜登樓非玩月 三朝辟穀未成仙)”라는 시구도 곤궁한 삶을 완곡하게 표현했다. 

다음은 굶주림을 묘사한 명작의 詩이다. 굶주림을 참다 못해 관아에 환곡미를 얻으러 갔으나 관아 호적에는 아예 그의 이름이 없어 곡식을 빌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낙담한 그는 관아의 다락에 올라가 다음 시를 지었다.  

환곡을 구걸하며 乞糶(걸곡)

山禽舊識山人面(산금구식산인면)

산새는 진작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고 있건만 

郡藉曾無野客名(군적증무야객명)

관아 호적에는 아예 들늙은이 이름이 빠졌구나 

一粒難分太倉粟(일립난분태창속)

큰 창고에 쌓인 쌀을 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 

高樓獨倚暮烟生(고루톡기모인성)

높은 다락에 홀로 오르니 저녁밥 짓는 연기 피어오르네 

82세의 조수삼이 정약용의 아들이자 저명한 시인인 정학연과 함께 시를 지을 때 정초부를 언급하며 “오백년 문명이 영정조 임금 때에 꽃피웠으니 나무꾼과 농사짓는 여인네까지 시를 잘 지었네”라고 평가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삶의 文物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두 풍성해야 태평성대라 말할 수 있다.

저작권자 © 혜인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